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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하) : 진보를 믿는 한 역사학자의 논리와 열정

long&cucumber 2020. 3. 3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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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역사의 연구란 원인의 연구라고 할 수 있어요. 좋은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저자는 정의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어떤 사건에 대해 원인을 규명해야 할 입장에 처할 때 진지한 역사가라면 한 가지 원인만이 아닌 몇 가지의 원인들을 찾아내서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설정한 후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원인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죠. 그가 어떤 원인을 내세우는가에 따라서 어떠한 역사가인지도 드러나게 된다고 해요.

 

이 장의 대부분의 내용은 역사의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종종 빠지게 되는 두 가지 함정에 대해 설명하고 해명하는 일에 바쳐져 있어요.

 

첫 번째 함정은 역사에 있어서의 필연에 대한 것으로서 이것에는 헤겔의 간계라는 별명이 붙어 있어요. 20세기 들어서 칼 포퍼나 이자이아 벌린 같은 역사학자들이 주로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결정론적 역사주의라고 부르며 공격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헤겔과 마르크스를 변호하고 있어요. 벌린이나 포퍼에게 있어서 인간행동이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인 설명에 치중하려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해석은 배격되어 마땅한 결정론적 태도라는 것이죠. 하지만 저자는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특수한 직무이며, 역사가가 원인탐구에 몰두한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두 번째 함정은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에 대한 것인데 여기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별명이 붙어 있어요. 어떤 이들은 역사라는 것의 대부분이 우연의 집합체이고 우연의 일치에 의해 좌우될 뿐이라고 주장해요. 이런 주장에 따르면 악티움 해전의 결과는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원인들 때문이 아니라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저자는 역사해석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를 강조하는 이런 성향이 주로 역사가가 처한 시대 상황과 관련이 깊다고 지적해요. 고대 로마의 타키투스나 영국의 뷰리, 독일의 마이네케와 같은 역사가들이 우연적 요소에 집착하여 역사를 해석한 것은 그들이 국가적 쇠퇴기, 시대적 혼란기에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시험의 결과란 결국 제비뽑기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생각은 열등생들에게나 인기 있는 태도라는 거죠. 그러면서 역사를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적으로 태만하거나 지적 활동력이 빈약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독설을 퍼붓고 있어요.

 

 

5. 진보로서의 역사

저자는 각 시대별 역사관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이 장을 시작하고 있어요. 역사에 진보의 개념이 도입된 것은 중세 기독교 역사관인데 그 목표를 현세화시킨 것은 계몽시대였어요. 역사에 있어서 이 진보에 대한 신앙은 영국의 번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역사학계에서 진보라는 용어 자체가 거의 폐기처분 상태라고 진단하고 있네요.

 

저자는 진보라는 용어에서 몇 가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바로잡은 다음에, 역사에 있어서 진보의 본질적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논하고 있어요.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환경에 대한 지배력이 역사적으로 증대되어 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죠. 의문시 되는 점은 20세기 들어서 사회질서의 형성에 어떤 진보가 있었는지, 오히려 퇴보의 모습이 더 뚜렷한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이에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진화는 기술의 발달에 비해 결정적으로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저자는 묻고 있어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만한 징조가 확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보의 개념을 폐기시키고 퇴보를 인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에요. 그 이유는 오늘날의 시대가 대륙간, 국가간, 계급간 세력균형에 있어서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투쟁의 시기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마치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의 시기가 그랬던 것처럼요. 퇴보가 아니라 큰 그림 속에서의 진보라는 의미예요.

 

역사의 진보에 대해 논하면서 저자는 객관성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어요. 책의 전체 내용 중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이 장에 소개된 독일제국과 비스마르크를 예로 들어 볼께요. 독일이 20세기에 들어서서 파탄의 길을 걸었던 것은 비스마르크로부터 시작된 독일제국 내부의 어떤 보이지 않는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제국 건립 당시 이미 세계무대에 기존 강대국들이 팽창하고 있어서 또 하나의 팽창성향이 강한 강대국의 출현만으로도 대규모의 충돌과 붕괴가 불가피한 상황이었을까요?

 

이러한 역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에는 19세기 말의 역사가보다는 20세기 초의 역사가가 더 객관적 판단에 가깝고, 그들보다는 21세기 역사가가 더욱 더 객관적 판단에 접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역사의 객관성이란 것이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기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 역사의 진행방향이 이미 자명하게 주어져 있다거나 혹은 역사의 외부에 그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저자는 단호하게 거부해요 -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발전하는 미래지향적 기준에만 의존해서 존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역사적 판단의 궁극적 기준을 미래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 주장에 대해서는 미래에 살아남는 자의 다른 이름, 즉 성공만을 판단의 궁극적 기준으로 삼는 것 아니냐는 만만치 않은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죠.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지나온 방향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해요.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마지막 6장의 내용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6. 넓혀지는 지평선

서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이성과 자기의식의 중요성을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은 데카르트 때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루소와 계몽주의를 거쳐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이성의 능력을 확장시키고 자신과 환경에 대한 이해와 지배력을 증대시켜 왔어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죠.

 

어떤 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경제분야예요. 20세기 초까지 개인이나 국가의 모든 경제행위는 객관적인 경제법칙의 지배를 받아왔어요. 대표적인 것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방임경제가 통제경제로 전환됨에 따라 이러한 규칙은 깨져버리게 돼요. , 국가나 사회경제는 더 이상 비인간적인 법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내리는 결정에 의해 방향이 정해진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죠.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경제적 운명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감을 갖게 된 셈이에요. 경제분야 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인간은 이성의 의식적인 활용을 통하여 환경을 변화시키고 자기 자신을 개조하는 일을 시도해 나가는 중이에요.

 

저자는 또 한 가지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양상으로 세계의 외형상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어요. 15-16세기 중세시대가 붕괴되고 근대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이런 특징이 나타났었다고 해요. 신대륙이 발견되고, 세계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진 것이죠. 20세기의 혁명이 가져온 변화도 이런 특징을 수반하고 있어요. 세계의 중심이 서유럽에서 북미대륙으로 이동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오늘날 세계문제를 좌우하는 것은 과거처럼 서유럽이 아니라 동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이 점점 그 역할을 대체해가고 있죠.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양의 역사가들이 과거의 향수에 젖어서 자국의 역사만을 세계사의 중심이라고 여기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변두리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는 세태를 비난합니다. 옥스포드나 캠브리지 같은 대학에서조차 페르시아나 중국과 같은 유서 깊은 나라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 강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해 우려 깊은 시선을 던지고 있어요.

 

이 마지막 장에 와서 저자가 자신의 조국인 영국이나, 나아가 역사의 흐름에서 일찌감치 앞서 나갔던 서구세계의 안일에 대해 염려하고 질책하는 대목은 인상 깊어요. 그리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역사의 변방국가들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진출하게 될 것을 예견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짜릿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이 책이 쓰여진지 반 세기 이상 지난 지금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역사의 진보를 굳게 믿는 낙관론자임을 자처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세계의 진보라는 것은 (..,) 인간이 자기 자신을 현존 방식의 단편적 개량에만 국한시킨다는 태도 하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 그것은 주로 목전의 제도와 그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음양의 전제에 대하여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대담한 각오를 통해서만 이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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