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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현대적 비극의 아름다움을 구현한 소설

long&cucumber 2020. 3. 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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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9년이 이 소설을 쓴 작가 허먼 멜빌의 탄생 200주년이었어요. 여기저기서 멜빌에 대한,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소설모비딕에 대한 글들을 읽게 되었죠.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이유로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나고, 책과는 그리 관련 없지만 금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베토벤의 음악을 자주 듣게 될거 같아요. 자연과학의 차원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한 해 한 해에 대해 숫자를 붙여서는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만의 능력이죠. 어쩌면 제가 지금 이 책을 선택한 것도 작년의 기억에 대한 자발적 강박관념(?)의 결과 같아요.

 

작가 탄생 몇 주년이다 하는 것을 기념할 때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더 다양한 판본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모비딕만 해도 작년을 기점으로 뛰어난 번역본이 추가되었고, 거기에다가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삽화본이나 그래픽 노블까지 선택의 폭이 넓어졌어요. 저도 그 중에 하나를 읽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어떤 출판사의 책을 선택하든 벽돌 두께의 분량이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단순해요.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생애 처음으로 포경선 선원이 되기로 결심해요. 지원하러 가는 도중 묵게 된 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이교도 작살잡이 퀴퀘크를 만나게 되고 함께 피쿼드 호의 선원이 되죠. 그리고 어느 추운 크리스마스에 포경업의 유서 깊은 전초기지인 낸터컷을 출항하게 된답니다. 모든 사건은 이슈메일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어요.

 

이슈메일이 승선한 피쿼드 호의 선장은 에이해브란 인물인데 그는 모비딕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 쪽 다리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어요. 항해를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모든 선원들이 보는 앞에서 16달러 짜리 스페인 금화를 돛대에 박아 넣으며 모비딕을 발견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죠. 선원들은 열광하지만 일등 항해사 스타벅(유명한 커피점에 이름을 제공한 그 인물이에요)은 평소와 같이 고래를 잡으러 왔지 선장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대답해요. 그는 뛰어난 작살잡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정직한 인물이에요. 스타벅은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있는 에이해브 선장 곁에서 마지막까지 현실적인 조언자 역할을 하죠.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의 선원들은 도중에 향유고래 몇 마리를 포획하기도 하고, 다른 포경선을 만나 모비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면서 항해를 계속해요. 그런 중에도 에이해브는 바다와 고래잡이에 대한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집중시켜 모비딕을 추격하죠. 그는 한 마디로 광기에 사로잡힌 복수의 화신이에요. 그런 에이해브에게 스타벅은 말하죠.

 

"말 못하는 짐승한테 복수라니! 그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이에요!"

 

이렇게 일등항해사 스타벅과 충돌하면서도 에이해브 선장은 다른 선원들을 독려(라기보다는 거의 협박)하면서 대서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지난 후 과거에 자신의 한 쪽 다리를 모비딕에게 내주었던 일본 부근 태평양에까지 도달하게 돼요.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른 132(이 소설은 총 135개의 짤막짤막한 장들로 이루어져 있어요)에서 우리는 강철같은 의지와 광기로 둘러싸여 있는 에이해브 선장에게도 인간적인 따뜻함이 남아있음을 알게 돼요. 그는 스타벅의 진실된 눈 속에서 고향에 두고 온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고통스럽고 고독한 심정을 털어놓죠.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스타벅의 간청을 끝내 거절하고 최후의 결전에 몸을 맡깁니다.

 

소설의 마지막 세 개의 장은 사흘 동안 펼쳐진 모비딕과의 사투를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결국 에이해브와 모든 선원들은 피쿼드 호와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답니다. 아니, 30명이 넘는 선원들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다는 것을 빠뜨릴뻔 했군요. 이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이에요. 그는 열병으로 죽어가던 퀴퀘크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관에 의지하여 표류하다가 구조되어 이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줄거리 파악에만 신경을 기울인다면 작품의 묘미를 90% 이상 놓치는 셈이에요. 영화를 만든다면 모르겠지만(왕년의 유명배우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가 있어요) 소설로서 읽는 것이라면 줄거리보다 중간 중간에 잡다하게 언급되고 있는 고래와 관련된 별의별 이야기들이 훨씬 더 흥미로워요. 언급되고 있는 내용으로는 고래의 종류, 포경선의 구조, 잡힌 고래의 해체 과정,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래그림에 대한 평가 등등 다양하고 기발하기 이를 데 없어요. 그 중에서도 크기와 특징에 따라 고래들을 분류해 놓은 32장이나,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의 차이에 대해 법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89장 같은 부분은 특히 재미있어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내용을 표현해 내는 유머러스하고 조금은 수다스러운 문체가 이 소설의 큰 특징이자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유머와 수다 속에 저자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어요. 물론 겉으로는 포경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요. 이를테면 고래의 종류를 분류한 후에 "나는 쾰른 대성당이 탑 꼭대기에 아직 기중기를 세워둔 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라고 여지를 남겨두기도 하고, 포경밧줄에 대해 설명한 후에 "인간은 누구나 포경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하죠. 소설은 이러한 은유법의 문구들로 가득해요. 그 중에서도 제 마음에 가장 남았던 문장은 다음과 같은 에이해브 선장의 독백이었어요.

 

"오오,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이 독백처럼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육체와 생명을 파괴시키고, 소설 자체도 비극적인 파국으로 끝을 맺죠. 미국의 소설가 D.H. 로렌스는 모비딕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기이한 작품이라고 평했다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파괴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이야말로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문학적 생명력으로 가득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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