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하) : 주체적 여성의 영원한 표상
제인 에어는 리드 부인을 만나기 위해 손필드를 떠난 지 한 달 만에 돌아옵니다. 로체스터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반겼으나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가 곧 잉그램 양과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기는 짝사랑하는 로체스터를 떠나야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울해합니다. 하지만 로체스터는 잉그램 양이 재산만을 바라보며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인 에어에게 프로포즈를 합니다. 실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는 제인 에어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씨, 지적이면서도 사려깊은 태도에 깊은 호감을 갖고 그녀를 관찰해왔던 것입니다. 제인 에어는 자기가 예쁘지도 않고, 더구나 신분과 재산에 있어서 너무나도 차이가 큰 상대라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믿지 못하다가 곧 그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4주 후로 예정된 결혼 날짜는 순식간에 다가오고, 그 시간 동안 제인 에어는 꿈꾸는 듯한 행복감을 느끼며 지냅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이틀 앞둔 밤 제인 에어는 자신의 방에 침입하여 결혼식 날 착용할 자기의 베일을 찢어버리고 나가는 무시무시한 여인을 목격합니다. 그레이스 풀도 아니고,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여인이었습니다. 다음 날 로체스터에게 이야기를 하자 그는 분명히 그레이스 풀이었을 것이라고 그녀를 안심시킵니다. 제인 에어도 그렇게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결혼식 날을 맞게 됩니다.
손필드 저택 바로 옆 조그만 교회에서 시작된 결혼식은 그러나 방해꾼에 의해 곧 중단됩니다. 얼마 전 손필드를 방문했다가 그레이스 풀에게 공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던 메이슨이었습니다. 메이슨 씨는 로체스터가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기혼자이며 그 아내가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그 결혼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갑작스런 방해꾼의 폭로로 분노하게 된 로체스터는 결혼식을 중단시키고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15년 전 서인도 제도에서 메이슨 씨의 여동생 버사 메이슨과 결혼했으며, 그녀는 지금 손필드 저택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저택 3층의 밀폐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하녀 그레이스 풀의 감시를 받으며 갇혀 지내는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을 모두에게 보여줍니다. 결혼식 이틀 전 제인 에어의 베일을 찢어버린 것도, 그 전에 메이슨 씨의 팔을 칼로 찌르고 물어뜯은 것도, 그리고 그 훨씬 전에 로체스터의 침실에 불을 지른 것도 그레이스 풀이 아니라 바로 버사 메이슨이었던 것이죠.
마지막 순간에 깨져버린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와의 결혼은 둘 모두에게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로체스터는 자신의 거짓과 배신에 실망해 있을 제인 에어에게 진실을 모두 털어놓습니다. 버사 메이슨과의 결혼은 신부 집안의 재산에만 눈독을 들인 자기 아버지의 탐욕과, 집안 혈통에 이어져 흐르던 광인 기질을 숨긴 채 결혼을 진행시킨 메이슨 가의 속임수, 그리고 젊은 시절 자신의 신중치 못한 판단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자기는 여전히 제인 에어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진심을 고백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려 합니다. 제인 에어 역시 로체스터의 불행한 과거를 동정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만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이 믿고 살아온 삶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진짜 그의 곁을 떠납니다.
목적지도 없이 우연히 만나게 된 마차를 얻어타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손필드에서 멀리 떨어진 위트크로스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약간의 돈과 음식마저 다 떨어진 후 제인 에어는 거지 신세가 되어 숲속에서 하루 이틀 잠자리를 청하기도 하고, 마을의 이집 저집을 다니며 음식과 일거리를 구하는 처지가 됩니다. 사람들의 의심과 냉대 속에 지쳐 삶의 희망을 놓기 직전 그녀는 어느 가정의 동정과 환대 속에 겨우 머물 곳을 찾게 됩니다. 무어하우스라고 부르는 그 집에는 세인트 존, 메리, 다이애나, 이렇게 삼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젊고 잘생긴 세인트 존은 작은 시골 교구 목사였고, 그의 두 여동생들은 따뜻한 마음씨와 지적인 소양을 갖춘 처녀들이었습니다. 제인 에어는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점점 즐거움을 느끼게 되죠. 물론 자기의 신분과 과거는 비밀로 해둔 채로...
제인 에어가 무어하우스에 온 지 한달이 지났을 때 메리와 다이애나는 원래 하던 일인 도심지의 가정교사 일을 계속하기 위해 떠나고, 세인트 존도 목사관으로 이주합니다. 가난했던 세 남매는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한 달간 무어하우스에 함께 머물렀던 것인데 원래 위치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제인 에어는 세인트 존이 주선해준 시골 여학교 교사 일을 시작합니다. 글도 모르는 농사꾼 딸들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보수도 적었지만 제인 에어는 일자리가 생긴 것에 감사했고, 그 일에서 자기의 재능과 성실성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를 후원하는 올리버 가문의 외동딸 로저먼드 양을 만나게 되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인 로저먼드 양이 세인트 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세인트 존 역시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둘의 결혼을 도와주려 합니다. 하지만 세인트 존은 로저먼드 양이 선교사의 아내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거절합니다.
어느 눈 내리던 밤에 세인트 존이 제인 에어를 찾아와 그동안 비밀로 부쳐왔던 그녀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로체스터와의 관계까지도 말하여 그녀를 놀라게 합니다. 제인 에어가 손필드를 떠난 직후 로체스터가 그녀를 찾는 광고를 여기 저기에 실었던 것이죠. 또한 과거에 리드 부인에게서 들은 바 있던 제인 에어의 먼 친척이 그녀에게 2만 파운드의 유산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더 놀라운 일은 세인트 존 남매가 실은 제인 에어와 사촌 관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거액의 유산뿐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에 제인 에어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죽기 직전 자기를 구해주고 돌봐주었던 세인트 존, 메리, 다이애나와 유산을 공평히 나누고 무어하우스에 다시 모여 살기로 합니다. 다시 함께 지내게 된 네 사람은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도 잊지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 세인트 존의 선교사 출발 일정이 정해지고 그는 제인 에어에게 자기의 아내가 되어 함께 인도로 가자고 부탁합니다.
“제인, 나하고 함께 인도로 갑시다. (...) 하느님과 자연은 당신을 선교사의 아내로 만들려고 정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자연이 당신에게 주신 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재능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노동을 위해 생겨났습니다. 당신은 선교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작정입니다”(하권 p.323)
그때까지 복음선교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제인 에어였지만 세인트 존의 결연한 요구에 설득되고, 또 한편으로는 로체스터와의 관계를 잊기 위해서라도 세인트 존을 따라나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사랑도 없는 결혼관계로가 아니라 누이동생과 동역자로서 함께 하겠다고 말하죠. 하지만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는 세인트 존은 결혼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계속 설득하고 기다립니다. 제인 에어는 세인트 존에게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의 요구가 진심이며 숭고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참뜻을 알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제인 에어는 자기를 부르는 로체스터의 신비한 목소리를 듣고는 마지막으로 그를 한번 만나본 후에 인도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다음날 제인 에어는 일 년 전 무어하우스를 찾아왔던 길을 반대로 거슬러 가는 마차에 몸을 싣고 손필드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그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죠. 인근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손필드를 떠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이 집에 불을 질렀고, 그 화재로 그녀는 죽고 로체스터는 아내를 구하려다가 한쪽 팔을 잃었으며 실명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손필드에서 30마일 떨어진 펀딘 농장에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즉시로 마차를 달려 도착한 펀딘 농장에서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와 재회합니다. 삶의 모든 즐거움과 희망을 상실한 채 살고 있는 그를 보고는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리고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하죠. 또한 자기가 세인트 존과 함께 기도하면서 신비한 음성을 들었던 시각이 실제 로체스터가 간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때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합니다.
결국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는 결혼식을 올립니다. 제인 에어는 그의 잃어버린 한 팔과 두 눈이 되어 행복한 생활을 하죠. 다행히 결혼한 지 2년쯤 지났을 때 로체스터는 한쪽 눈의 시력을 회복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자기 자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죠. 그리고 이야기가 끝마쳐질 즈음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합니다.
“심판을 하시는 가운데에도 자비를 잊지 않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원하옵건대 구세주시여, 지금까지보다도 순결한 생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내려 주시옵소서!”(하권 p.414)
소설 『제인 에어』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지금까지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남녀 주인공의 낭만적 사랑이나 미친 여자가 숨어 살고 있는 음산한 저택 등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때마다 자주 도마에 올랐던 것이 주인공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캐스팅이었다고 하네요. 소설에서는 분명히 남녀 주인공 모두 예쁘거나 잘생기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영상으로 제작할 때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특히 제인 에어의 외모에 대해서는 소설 속에서 여러 번에 걸쳐 언급되는데 주인공 속에 작가 자신이 투영되어 있어서인지 작가는 이를 객관화시켜 유머스러움이 느껴지게 합니다.
“아마 날 보고 실망했겠죠, 베시.” 내가 웃으며 말했다. 베시가 나를 보는 눈초리는 경의의 마음은 표시하고 있지만 감탄하는 빛은 조금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니, 제인 아가씨, 그렇지도 않아. 고상하고 숙녀같이 보여요. 그 정도는 될 줄 알았으니까요. 아가씬 어렸을 때도 미인은 아니었으니까.”
(상권 p.160 : 8년만에 다시 만난 제인 에어와 베시와의 대화)
“그분이 선생님과 결혼하겠다는 것이 진정일까요?”
“그렇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녀는 나의 온몸을 흝어보았다. 그 수수께끼를 풀어 줄 만한 아무런 매력도 내 외모에서 발견하지 못했음을 나는 그녀의 두 눈에서 읽어 냈다.“
(하권 p.54 :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에게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후 페어팩스 부인과 제인 에어와의 대화)
소설 속에는 당시 영국 사회의 종교, 신분, 결혼 등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 재산이나 신분제도가 여성의 낮은 권리 등과 얽혀서 당시 결혼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인습적이었는지를 작가는 여주인공의 눈과 입을 통해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로체스터 씨 같은 신사의 처지라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내만을 고르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이 자신의 행복에도 유리하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흔히 실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필경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배우자를 고를 것이기 때문이다“(상권 p.337-338)
제인 에어는 사랑보다 신분이나 재산이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어 있는 결혼풍습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로체스터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이유 때문에 잉그램 양과 결혼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좌절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차갑게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내가 당연히 또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더 큰 대양, 재산, 계급 그리고 사회 인습이었다.“(하권 p.28)
그러나 작가는 이 러브스토리를 비극으로 마무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동생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과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오만과 편견』에서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관계만큼 상큼하지는 않지만 쓰디쓴 인고의 과정 끝에 맺게 된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의 열매는 그래서 더욱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