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이성과 논리의 향연(하)
아리스토텔레스
제8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정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자격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플루트를 배분할 때 최고의 플루트는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플루트란 악기는 연주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목적론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세계 속에 의미있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이런 사고방식은 이제는 낡은 개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을 목적론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도처에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의 존재목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입시에서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실시해야 하느냐 마느냐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학이 학문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반대할 것이고, 대학이 사회의 공익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찬성할 것입니다.
핵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있습니다. “과연 대학이나 사회기관, 혹은 정치활동 등에 대해 그 목적을 추론하거나 규정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를 예로 들자면 오늘날에는 정치에 특별하고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고, 정치를 사람들 스스로 목적을 선택하게 만드는 절차 정도로 여깁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치의 목적은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치에는 군사방위나 경제활동과 같은 것도 포함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목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정치의 본질적 목적은 좋은 시민으로서의 미덕 및 좋은 삶과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자격과 분배의 원칙이 생겨납니다.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을 위한 것이기에 최고 공직과 영예는 경제요건에 의해서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가장 뛰어난 미덕을 갖춘 사람, 공동선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 오늘날 미국이라면 링컨 같은 사람이겠죠.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의는 적합성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리배분이란 사회기관의 목적을 확인한 후 그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본성을 실현할 기회는 주는 것이죠. 심지어 그는 본성적으로 노예의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의 정치론은 적합성이라는 개념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칸트부터 롤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정의론자들은 목적론적 사고가 자유와 어울리지 않음을 지적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는 적합성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목적과 적합성이란 개념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위협할 수 있는 개념이죠.
집단책임의 문제
제9장에서는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배상하는 일이 필요한지에 대해 묻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은 유태인 학살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는 일을 해왔으나 일본 정부는 2차 대전에서의 만행을 사과하는 데에 미온적이었습니다. 국가가 과거의 역사적 잘못을 사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집단책임이라는 어려운 개념이 뒤따릅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자명합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행위를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때로는 이러한 사과나 배상의 시도가 오히려 오랜 피해의식과 적대감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이런 태도를 저자는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떠맡은 의무만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이런 자유주의적 사고는 존 로크의 합리적 개념, 칸트의 자율적 자아, 그리고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이어지는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칸트와 롤스는 정치가 좋은 시민으로서의 미덕을 함양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칸트와 롤스는 권리가 선보다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더구나 무엇이 미덕이고 선인지 누가 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두 사람은 국가가 법이나 강제력을 동원해서 어떤 정해진 미덕이나 가치를 강요해서는 안되기 때문에(아직도 간통한 사람에게 돌을 던지거나 부르카로 온몸을 휘감지 않으면 처벌하는 무슬림 사회를 떠올려 보십시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중립적인 국가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이 기초를 닦은 정의론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는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정치와 법이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해 줍니다. 사실 오늘날 미국의 주류 정치세력은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고에도 결함이 있다고, 즉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제시합니다. 이런 이의제기를 공유하는 자신과 몇몇 학자들의 관심사를 저자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 해답으로서 저자는 A. 매킨타이어의 “서사(narrative)”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매킨타이어는 자신의 저서인 「덕의 상실」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의 정체성을 지닌 자로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런저런 도시의 시민이며, 이런저런 조합 또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다. 나는 이런저런 친족, 부족, 나라에 속한다. 그러므로 내게 좋은 것은 소속 집단 사람들에게도 좋아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친족, 내 나라의 과거로부터 다양한 빚, 유산, 정당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기정사실을 구성하며 내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이는 부분적으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신이 한 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에 노예제도에 대한 책임을 일체 부인하는 현대의 미국인들이나, 자기는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독일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천박한 태도라고 비판합니다.
칸트와 롤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인간에게 부여되는 의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이기에 생기는 자연적 의무(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대우하며 잔인한 행동을 삼가야 하는)와, 합의에 의해 생기는 자발적 의무(예를 들어 상호간의 계약과 같은)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는 사람들은 인간의 의무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설명이 너무 빈약하게 보입니다. 그들은 세 번째 의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연대의무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애국심을 들 수 있습니다. 애국심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인정해야 하고 때로는 고취시킬 필요도 있다고 그들은 봅니다. 흔히 자기 사람만 챙기는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내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때 특히 중요하다고 주장하죠. 독일인이 유태인들에게, 혹은 미국 백인이 미국 흑인에게 대해서처럼 말입니다. 저자는 내 나라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배상하는 일은 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며 이 장의 처음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좋은 삶
책의 마지막 장인 10장에 와서 저자는 미국의 두 명의 대통령, 즉 케네디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을 비교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둘 다 젊은 리더였고, 연설과 동기부여에 능했으며, 그들의 당선은 미국의 리더쉽이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는 신호였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했지만 정치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매우 다른 견해를 보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 최초로 카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의 종교가 사적인 문제일 뿐이며 공적 책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케네디의 말은 카톨릭에 반대하는 세력을 누그러뜨릴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1960-70년대 절정을 이루었던 공공철학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철학이란, 정부는 도덕적·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 무엇이 좋은 삶인지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철학입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정치적인 역할에 대해서 매우 다른 견해를 취했습니다.
“세속주의자들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공적인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종교를 문 앞에 내려놓으라고 요구한다면 잘못입니다. 프레더릭 더글라스, 에이브러햄 링컨,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도로시 데이, 마틴 루서 킹 등 미국 역사상 위대한 개혁가 다수는 신앙에 자극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종교적 언어를 수시로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공공 정책을 논할 때 ‘개인의 도덕’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합리합니다. 우리 법은 의미상 도덕적 집대성이며, 그 도덕의 상당 부분은 유대 기독교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케네디의 생각은 존 롤스의 정의론에 기초하고 있고(롤스의 「정의론」이 출간된 때가 1971년이므로 실은 존 롤스가 케네디의 정치적인 시각을 옹호했다고 표현해야겠죠),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주의적 중립성을 비판하며 나선 1980년대 공동체주의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와 권리에 관한 공개담론에서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배제해야 할까요? (...) 롤스는 현대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원주의를 존중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덕적·종교적 이견에 직면했을 때 관용을 베풀 필요가 있기 때문에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를 지지하며 정의와 권리에 대한 논의에서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도덕적·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해결이 불가능한 몇 가지 익숙한 정치문제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가지가 낙태문제입니다. 낙태를 법적으로 반대하는 쪽이나, 낙태를 여성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정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쪽이나 실은 둘 다 문제의 바탕이 되는 도덕적·종교적 논란(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가의 문제)에 대해 모종의 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는 문제는 동성결혼을 국가가 승인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동성간의 결혼을 정부가 불허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성결혼과 똑같이 동성결혼도 승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나 이것을 단지 개인의 자유의 문제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본다면 서로 합의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 결혼도 승인해 주어야 하죠. 동성결혼 논쟁의 진짜 핵심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어떤 결혼이 공동체로부터 인정과 영예를 받을 가치가 있는가의 문제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목적론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지금까지 논의한 정의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 중에서 자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방식을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정의란 단지 자유나 올바른 분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올바른 가치와 공동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최근에 서점을 가보니 「십대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나와 있네요. 초등학교 5학년 자녀에게 한 권 사준 후 반쯤 읽은 듯 보였을 때 물었습니다.
“어때, 재미있니?”
“책이 이상해.”
“왜?”
“답은 없고 계속 질문만 나와.”
어린이의 눈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네요. 예,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답을 제시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 답을 찾고 자기 생각을 형성해 가도록 하기 위해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