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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의 형제』: 사랑과 종교에 관한 심리학적 보고서(하)

long&cucumber 2020. 8. 2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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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는 비록 카라마조프의 가족은 아니지만 주인공 알료샤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스승인 조시마 장로에 대해 많은 비중을 두고 묘사하고 있어요. 2부의 후반부에는 조시마 장로의 어린시절과 신앙적 회심 경위,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 설교 내용 등이 꽤 길게 언급되어 있고, 3부는 그의 죽음의 사건으로 시작되죠. 그를 성자로 추앙하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어떤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리라 기대해요.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시체가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하죠.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슬픔과 당혹스러움이,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소동이 있게 됩니다. 알료샤도 이 일로 인해 충격을 받지만 관 속에 누워 있는 장로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시신 옆에서 어느 신부가 성경 낭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됩니다.

 

낭독하던 부분은 요한복음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였어요. 어느 가난한 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예수님이 포도주 모자란 것을 보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는 내용인데 평소 조시마 장로가 좋아했던 말씀이었죠. 금욕주의와 신비주의가 만연했던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조시마 장로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평범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조했고, 그 때문에 반대자들의 많은 비난이 따르기도 했었죠. 알료샤는 뒤늦게 장로가 왜 자기에게 수도원에 머물지 말고 떠나라고 당부했는지 깨닫게 되고 세상으로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수도원을 나온 알료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거나 마을의 어린 소년들을 올바른 가치관으로 이끌어주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는 중에 자기 형 미챠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 어느 가난한 퇴역장교를 알게 되고, 그의 어린 아들 일류샤의 친구가 됩니다. 일류샤는 원래 몸이 약한 아이였는데 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사건을 목격하고 더욱 건강이 악화됩니다. 더구나 그 집은 가난해서 병을 치료할 형편도 못되고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죠. 알료샤는 가난한 일류샤의 집을 일류샤의 어린 친구들과 함께 매일 방문하여 돌보아주고 격려해 줍니다.

 

바로 그 시각, 미챠는 그루셴카가 자기 몰래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나 않았을까 의심하며 아버지 집에 찾아갔다가 우발적으로 하인 그리고리에게 심한 부상을 입힙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직후에 그루셴카가 사실은 옛 애인(열일곱 살 때 사랑했다가 배신당한 어느 폴란드 장교)을 만나기 위해 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밤중에 정신없이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나 자신을 벌하노라고 적은 쪽지와 실탄이 장전된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서 말이죠. 그는 그루셴카를 마지막으로 만나보고 그녀를 옛 애인에게 양보한 후 깨끗하게 자살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 도착해 보니 그루셴카와 옛 애인과의 관계는 틀어져 있었고 미챠는 그루셴카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며 흥겨운 술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검사와 예심판사, 경찰서장 등이 찾아와 표도르를 살해한 혐의로 미챠를 체포합니다. 미챠는 예비심문을 통해 하인 그리고리에게 부상을 입힌 것은 인정하지만 아버지 표도르 살해사건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증인들의 말이나 여러 가지 정황상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최종적인 판결이 날 때까지 구금이 결정됩니다. 이 때 미챠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어린아이의 꿈을 꾸게 되고, 그것이 앞으로 갱생의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아니지만 재판의 결과를 지금까지의 방탕했던 삶에 대한 참회와 정화의 기회로 여기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다만 유형수의 신분이라도 그루셴카와의 결혼이 가능할 것이지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죠.

 

 

[4 ]

미챠의 재판이 있기 전날 밤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에게 자기가 표도르를 살해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뿐 아니라 이반도 그 사건에 공범이라고 말합니다. 평소 이반으로부터 들었던,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말 때문에, 그리고 표도르가 살해되던 날 이반이 그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묵인했기 때문에, 자기는 실행한 것에 불과하고 진짜 살인범은 이반이라고 주장하죠. 이때 이반은 깨닫습니다. 사건이 있던 날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유산으로 받게 될 돈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심 기대하기까지 했음을. 그리고 양심의 고통 속에 점점 병들고 미쳐갑니다. 이반은 다음 날에 있을 재판에 출석해서 표도르의 살해범은 미챠가 아니라 스메르쟈코프라는 사실을 증언하기로 결심하고 스메르쟈코프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다그치지만 헤어진 뒤 몇 시간 후에 스메르쟈코프의 자살소식을 듣게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미챠의 재판과정에 대한 긴 설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심문이 오가던 중에 섬망증을 앓고 있는 이반의 출현과, 그 모습을 보고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미챠가 아니라 이반이었음을 깨닫게 된 카테리나의 결정적인 증언으로 인해 결국 미챠의 유죄가 선고됩니다. 하지만 그후 자기의 증언을 후회하는 카테리나와, 전부터 미챠의 탈출계획을 생각해온 이반, 그리고 알료샤 등은 유형지로의 이송 중간에 미챠를 탈주시키기로 합니다. 미챠는 그루셴카 없이 20년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어 하며 마지못해 탈주계획을 받아들이고, 만약 성공하게 되면 그루셴카와 함께 미국으로 갈 결심을 하죠.

 

소설의 대미는 불쌍한 소년 일류샤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곳에서 알료샤는 자기를 좋아하며 따르는 일류샤의 어린 친구들과 함께, 절대 일류샤를 잊지 말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잊지 말고 선량하고 용기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을 하나 고르라면 개인적으로는 죄와 벌을 들겠지만 그의 모든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을 한 명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이 작품의 주인공 알료샤예요. 그는 돈과 여자 밖에 모르는 난봉꾼 아버지와, 충동과 혈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큰 형,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냉혹한 회의론자인 작은 형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신에 대한 순수한 신앙과 주변의 약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동정심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인물이죠. 과연 그런 삶이 실제로 가능할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나의 주위에 그런 사람 한 명쯤은 있을 것이란 희망마저 없다면 인생은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감동했던 부분을 하나 꼽으라면 마지막 4부에 나오는 한 장면을 들고 싶어요. 최후 재판을 받기 전날 밤 자기를 면회온 알료샤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기 직전 미챠는 알료샤를 바라보며 질문합니다.

 

알료샤, 하나님 앞에서처럼 솔직히 진실을 말해다오. 넌 내가 죽였다고 믿고 있니, 안 믿고 있니? 속으로 그렇게 믿어, 안 믿어? 솔직히 말해. 거짓말을 해선 안돼!”

 

미챠의 질문을 받고 알료샤는 마치 자기 말의 증인으로 하나님을 부르기라도 하듯 오른손을 번쩍 들며 말합니다.

 

난 형님이 살인자라고는 단 1분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알료샤의 대답을 듣는 순간 미챠의 얼굴은 온통 행복감으로 넘쳐흐르죠. 그는 어쩌면 재판장의 무죄판결보다 알료샤의 이 말을 더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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