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한번 먹을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라죠. 그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든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입니다. 아테네 청년들을 부패시킨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을 때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변론한 내용을 그의 제자 플라톤이 기록한 것입니다.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대한 변론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하는데, 첫째는 오랜 세월 동안 자기에 대해 제기되어 왔던 비난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이 순간 그를 고발하여 법정에 세운 모함에 대한 변론입니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는 당시 정치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아니토스라는 인물과 그 추종자들이 주로 앞장서서 비난해온 내용인데, “소크라테스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과 아래로 땅 밑에 있는 것을 연구하여 궤변을 정설로 만드는 자”라는 비난이었습니다. 이런 비난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명성이 델포이 신전의 신탁 때문이라고 해명합니다. 즉, 아폴론 신으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신탁의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혼란스러워합니다.
“아폴론 신께서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나는 내게 지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왜 신께서는 나를 보고 가장 지혜롭다고 하셨을까?”
그는 신탁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당시 가장 지혜롭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신탁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증명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죠.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죠. 그 이후에도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고 소문난 많은 정치가와 시인, 장인들을 차례로 찾아가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나 나나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가 무언가를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반면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은 알고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더 지혜롭기는 하구나!”
하지만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죠. 반면 몇몇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추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금 법정에 세운 고발내용에 대해 변론을 이어갑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은 멜레토스라는 사람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이 도시가 믿고 있는 신들이 아니라 다른 잡신들을 믿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 고발내용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자기를 고발한 멜레토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의 주장이 모순되고 거짓투성임을 논증하려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죄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무죄로 풀려나야 할 뿐 아니라, 석방된 후에도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보다는 신께 복종할 것입니다. 내게 숨이 붙어 있고 그럴 힘이 있는 동안에는, 철학을 하고 여러분에게 조언하며, 어쩌다가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경고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겠습니다”(p.36-37)
나아가 그는 호소하기를, 그들이 자신을 사형에 처하도록 결정한다면 소크라테스 자신보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아테네 시민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책망하여 정신차리게 만드는 역할을 맡기셨는데, 만약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면 그 역할을 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더구나 소크라테스는 칠십 평생 그 일을 부지런히 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얻거나 보수를 받은 적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의 말이 사실임은 그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이 증명하고 있었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나와 있는 자기의 여러 친구들과 추종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언급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청년들을 타락시켰다고 비난하는데, 여기에 와있는 그 누구도, 당사자 뿐 아니라 그의 부모나 가족 중에서도 자기를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거나 청원하는 사람이 없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논증합니다. 반대로, 많은 법정에서 그러하듯이, 자녀들이나 가족을 앞세워 방면을 요청하거나 배심원들에게 애걸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그때 소크라테스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모든 결정을 신과 배심원들에게 맡기면서 변론을 마무리합니다.
1차 변론이 끝난 후에 소크라테스의 유무죄 여부를 결정하는 배심원들의 투표가 있었는데 유죄 평결이 내려지고, 그 형량으로 사형이 제안되었습니다. 관례에 따라 피고는 자신의 형량에 대한 변론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2차 변론 내용입니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유죄 평결이 내려진 것에 대해 놀라거나 분노하기보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오랜 비방과 모함으로 깊게 뿌리 내린 편견을 짧은 시간의 변론과 재판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자기에게 최종적으로 내려질 형량과 연관해서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징역형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신이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고 외국으로 가서 조용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려고 추방형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돈과 무관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벌금형을 선택할 수도 없었죠. 다만 법정에 나와 있는 플라톤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의 제안과 보증으로 30므나의 벌금형을 제시합니다. (참고로 30므나는 당시 노동자의 10년치 임금에 해당한다고 하니 꽤 큰 금액이네요.)
선고절차가 진행되고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언도됩니다. 그에게 마지막 변론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3차 변론 내용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기 위해서, 혹은 조금이라도 형량을 줄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고 애걸복걸했다면 사형은 피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법정에서든 전쟁터에서든 살아남으려는 일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죠.
“아테네 사람들이여, 죽음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비겁함을 피하는 것입니다. 비겁함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달려오기 때문이지요.”(p.54)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사형 선고를 요청한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합니다. 즉,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이 비판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들의 잘못된 삶을 더 가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닥쳐올 죽음에 관해서는, 그 일이 나쁜 일이라기보다 좋은 일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말합니다. 만약 죽는다는 것이 모든 지각이 사라지고 소멸해 버리는 것이라면 아주 편안한 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일일 것이고, 만약 죽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면 저승에 가서 오르페우스나 호메로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나쁘게 여기지 말고 좋게 받아들이고 선한 희망을 품으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변론을 마무리합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p.59)
최근 들어 좋은 삶(well being) 뿐 아니라 좋은 죽음(well dying)에 대한 관심 또한 많이 이야기되고 있죠.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주장 속에서 이미 그 주제가 많이 드러나 있네요. 역사상 정말 위대하다고 손꼽을만한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해요. 마치 고압전류처럼, 생각만 해도 우리 몸을 곤두서게 만드는 문제 앞에서 어쩌면 그토록 편안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요? 이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그러했고,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그러했고, 얼마 전에 접했던 안중근 의사의 생애 역시도 그런 특징이 분명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지고한 경지 같습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플라톤의 다른 작품들인 『크리톤』 및 『파이돈』과 합본되어 있습니다. 『크리톤』은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자신이 탈옥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파이돈』은 사형집행 직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추종자들이 모여 “영혼 불멸”이라는 주제로 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기에 연결해서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네요.
이처럼 오래전에 쓰여진 책을 읽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C. S. Lewis의 말을 인용해 드리고자 합니다.
“<옛날 책들은 전문가들만 읽어야 한다>, <아마추어는 현대의 책들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모든 학문 분야에 퍼져 있습니다. (......) 이런 오류에는 다소 호감이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에서 비롯된 행위인 까닭입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철학자를 대면하여 만나기가 반쯤은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그의 주석을 단 현대인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리 평범한 학생이라도 플라톤이 한 말을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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