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책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이에요. 제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지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 역시 드문, 그야말로 고전의 정의에 들어맞는 작품이 아닐까 해요. 마크 트웨인이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죠. “고전이란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이 읽기 싫어하는 책”이라고요. 그래도 이「죄와 벌」은 꽤 재미있게 읽혀요.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러시아의 수도 뻬쩨르부르크에서 휴학중인 가난한 법학부 대학생이에요. 그는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전당포 노파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갉아먹는 유해한 존재라고 여기고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해요. 그러면서도 자기의 계획이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죠. 바퀴벌레보다도 나을 것 없는 사람 하나를 죽이고, 그 부를 선하고 가치있는 일에 사용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려요. 하지만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노파의 죄없는 여동생까지 살해하게 되면서 일이 꼬이게 되죠.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현장을 들키지 않고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후 극심한 두려움과 가책을 겪게 돼요. 심한 열병을 앓고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게 되죠. 다행히 진실된 친구 라주미힌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해 가요. 하지만 마음의 불안감은 오히려 점점 심해져서 자수와 자살 사이를 오락가락 하던 중에 과거 술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마르멜라도프라는 사람이 사고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가난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팔며 살아가는 그의 딸 소냐를 알게 되고, 그의 가족들을 도와주게 돼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경험을 통해 다시금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회복하게 되는데, 자기가 베푼 도움으로 그들이 삶의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보자 자신의 범죄에 대한 정당성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런 와중에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던 주인공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방문해요. 그리고 여동생 두냐가 루쥔이라는 부유한 중년 남성과 결혼할거라는 소식을 듣죠. 하지만 그 둘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 아닌, 가난에 찌들어 살아가는 어머니와 오빠를 위한 희생 때문임을 알게 되고, 루쥔이라는 약혼자도 속물적인 인간임이 드러나 파국에 이르게 되죠. 두냐는 나중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인 라주미힌과 결혼하게 된답니다.
3부 중간쯤(총 6부로 되어 있어요)에는 뽀르피리라는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해요. 그는 그 지역 예심판사인데 추리소설 같은 데서 흔히 나오는 형사나 탐정 같은 인물이에요.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사건의 범인임을 확신하며 그와 치열한 심리게임을 벌이죠.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겁지만 이 소설이 범죄 및 추리소설처럼 나름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이유로는 이 뽀르피리라는 인물의 역할이 커요.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로 스비드리가일로프(러시아 소설에서 어려운 것은 스토리나 주제보다 이름이에요)가 있어요. 그는 주인공의 여동생 두냐가 자기 집 가정교사로 있을 때부터 그녀에게 접근하고자 했던 호색한이에요. 두냐를 만나기 위해 뻬쩨르부르크에 왔다가 그는 우연히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사건의 범인임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미끼로 두냐를 협박하여 그녀를 차지하려 하죠. 소설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하나 꼽으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두냐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이고, 그녀가 두려움에 떨며 그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이에요. 읽는 것만으로도 영화적 상상력이 자극된다고 할까요. 하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가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두냐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하자 바로 그 권총으로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겨요.
한편 소냐와 가까워진 라스콜리니코프는 갈등 가운데 자신의 범행을 소냐에게 고백해요. 그리고 그 말을 듣고도 자기를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진심으로 동정하며 눈물 흘려주는 소냐의 모습에 감동하죠. 아니, 감동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는 의아해 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그리고는 마침내 소냐의 권유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해요.
소설 뒷부분에는 길지 않은 에필로그가 붙어 있어요. 거기에는 자수 후에 진행된 재판 과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오고, 8년의 시베리아 유형생활 중 시작부분에 대한 묘사가 이어져요. 자수할 때까지도 자기가 왜 죄인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던 라스콜리니코프가 마침내 유형지까지 자기를 따라온 소냐의 무릎에 눈물을 쏟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을 맺고 있어요. 작가의 표현대로 라스콜리니코프에게도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소냐가 읽어주었던 성경의 나사로 이야기처럼 그의 삶에도 부활의 서광이 비추이게 된 것이죠.
소설 전체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에요. 이에 대해서는 3부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뽀르피리가 나누는 긴 대화 가운데 많이 언급되어 있어요. 세상에는 평범한 다수에 비해 더 많은 것이 허용되어 있는 극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에게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범죄나,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나폴레옹 같은 사람 말이에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가 나폴레옹인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노파를 죽인 셈이에요.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 동기는 이처럼 그가 신봉하던 신념과 관련이 많지만 또 한편으로는 학비가 없어 학업도 중단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의 가난한 상황과도 무관치 않아 보여요. 물론 소설 속에서는 돈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나 암시가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요. 어쩌면 가난과 비참한 생활이 그의 신념을 형성시키고 견인해 왔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초밥장인이 생선을 부위별로 회 뜨듯이 그렇게 깔끔하게 구분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원인과 결과가 이리저리 뒤섞여 있죠. 특히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자기 여동생 두냐가 가난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하려 하는 것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듯 보여요. 그는 가난 때문에 자기 딸 소냐를 창녀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마르멜라도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괴로워해요.
이 소설을 사랑의 소설로 읽어볼까요?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관계도 분명 사랑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의 사랑으로만 한정하기에는 어려운 초월적인 그 무엇이에요. 이에 반해 라주미힌과 두냐의 관계는 훨씬 더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어요. 아름다운 두냐 주위에는 여러 명의 남성들이 기웃거리는데 루쥔의 속물적인 감정이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집착과는 달리, 라주미힌의 두냐에 대한 사랑은 진실되고 이타적이에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묘사되는 부분은 마치 로맨틱 코미디처럼 읽히면서 소설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한층 밝게 만든답니다.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또 두냐와 라주미힌은요? 궁금하긴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아쉽게도 없군요. 독자들이 각자 나름의 상상력으로 마음 속에 소설의 다음 이야기를 이어 쓸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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