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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이성과 논리의 향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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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ng&cucumber 2020. 10. 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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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도덕철학

5장 전체는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에 대한 설명에 바쳐지고 있습니다. 우선 칸트는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공리주의를 거부합니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이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합니다. 이런 면에서 벤담도 옳았지만 절반만 옳았다는 것이죠. 우리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벤담은 옳았으나 쾌락과 고통이 우리의 통치권자라는 그의 주장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칸트는 우리가 가진 이성이야말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할 때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조종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또한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욕구를 방해받지 않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칸트는 이런 생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애초에 그 욕구가 자기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그는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강제되어진 목적에 반응해서 행동할 때 그것을 타율적인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도구가 되죠.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을 그는 자유로운 행위하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적 능력이 있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에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정의로운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칸트는 동기를 중요시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빵을 사러 가게에 들어왔을 때 주인은 아이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했다가 들통이 나서 장사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원래 가격대로 팔았다고 합시다. 이때 주인은 옳은 일을 했더라도 동기까지 옳았다고는 할 수 없죠. 칸트는 그런 행동을 도덕적 가치가 결여된 정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칸트의 견해에서 가장 엄격한 부분은 타인을 돕는 의무와 관련된 것입니다. 어떤 이타적인 사람들은 타인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들을 도우면서 쾌락을 느낍니다. 하지만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은 아무리 옳고 친절해도 도덕적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런 이타주의적인 동정은 찬사와 격려를 받을만하기는 하지만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쾌락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옳은 행동이라는 이유로(칸트의 용어대로 표현하자면 의무동기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저자는 칸트의 철학이 어렵지만 충분히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이해를 위한 좋은 방법으로서 칸트가 자신의 도덕철학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설명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섹스. 성도덕에 대한 칸트의 견해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입니다. 그는 부부 사이의 성관계를 제외한 그 어떤 성관계에도 반대합니다. 칸트가 이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둘 다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성관계는 오로지 성욕을 충족시킬 뿐 상대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자유로운 성도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칸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므로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죠. 비슷한 이유로 그는 매춘을 반대했습니다. 인간은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 몸을 마치 물건처럼 내놓아 상대가 성욕을 채우도록 허용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죠. 칸트는 오직 부부 사이의 성관계만이 인간성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고 결론내립니다. 두 사람이 상대에게 육체뿐 아니라 인간성과 영혼까지 함께 나눌 때에만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거짓말입니다. 칸트는 거짓말을 부도덕한 행위의 최고 사례로 꼽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선의의 거짓말까지도 그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례는 정치인데, 저자가 칸트의 주장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두 번째 사례와 세 번째 사례를 아우르는 예로서 책에 언급한 내용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명백한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진실을 오도하는 발언을 했을 뿐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인지, 혹은 둘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한 것인지, 책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250년 전 칸트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

6장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에 대한 장입니다. 롤스는 그의 책 정의론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필요한 원칙을 정하기 위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고 가정할 때 어떤 원칙을 선택할 것인가? 저마다 이해관계, 도덕적·종교적 신념, 사회적 지위에 유리한 서로 다른 원칙을 내세울 것이기에 합의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가상의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무지의 장막뒤에서 선택한다고 상상하는 것이죠.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한다면 그때 합의한 원칙은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선 공리주의는 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롤스는 추론합니다. “어쩌면 내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기 위해 억압받는 소수에 속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완전한 자유시장주의 원칙도 거부될 것이라고 그는 봤습니다. “나는 빌 게이츠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노숙자일지도 몰라. 그러니 가난한 데다 도움도 못받을 상황에 놓일지도 모를 제도는 피하는 것이 좋겠어

 

이러한 가상적 계약으로부터 롤스는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이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언론 및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된 원칙인데, 소득과 부를 완전히 똑같이 나누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불평등한 배분은 사회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허용되는 구조를 선택할 것이라는 거죠.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 롤스는 평등한(혹은 적어도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평등한 사회일까요? 봉건귀족 사회나 카스트 제도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장경제 사회는 출생에 따라 계급이 고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법 앞에 평등을 보장하기에 카스트나 봉건제보다 정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기회가 매우 균등하지 않게 배분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지원이나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확실히 유리하죠. 이러한 불공정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 경제적 불리함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부유한 가정 출신의 학생과 똑같은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제도 같은 것이 그런 예입니다.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해야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롤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애써 같은 출발선에 세우더라도 누가 승자가 될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죠. 소위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같은 출발선에 선다면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빠른 주자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노력에만 달린 문제는 아닙니다. 소득과 부의 배분이 역사적, 사회적 행운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되듯이, 타고난 자질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롤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해서 롤스는 평등을 보다 더 강조하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롤스의 주장에 색안경을 끼고 보겠지만 그렇다고 롤스가 주장하는 것이 획일화된 평등사회는 아닙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재능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그 재능으로 얻은 댓가를 공동체의 몫으로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롤스는 이것을 차등원칙이라고 불렀습니다.

 

차등원칙은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을 공동자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이용해 얻은 이익은 사실상 공유하자고 주장한다. (...) 천부적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단지 재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득을 얻어서는 안되며, 그들을 훈련시키고 교육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갚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그러한 행운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물론 롤스의 이런 주장에는 강력한 반론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조던과 같은 농구선수가 재능을 타고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재능을 갈고 닦은 노력의 댓가는 당연히 보상받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은 선수와 연봉격차가 별로 없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조건에서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마이클 조던은 열심히 연습하지 않거나 일찍 은퇴해 버리지 않을까요? (...) 롤스는 이에 대해, 노력도 혜택받은 양육환경의 결과일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노력하고 도전하고 소위 높은 자격을 누릴만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노력조차 도덕적 자격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롤스의 이론은 많은 사람들(특히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적 성취를 거두었고 그 보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자는 롤스의 정의론이 지금까지 미국 정치철학이 내놓은, 좀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대해 다루고 있는 제7장은 미국 텍사스 법학대학원 입학시험에서 일어났던 구체적인 사건 한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입학을 거절당한 백인 여성 한 명이 자기보다 낮은 점수를 받고도 합격한 흑인 학생을 지목하며 학교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죠. 텍사스 법학대학원은 당시 입학생의 15%를 소수집단에서 뽑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취업이나 입학시험에서 인종과 민족, 출신지역 등을 고려하는 제도는 정의로운 것일까요?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표준화된 시험에서의 편향과 격차를 조정해 줍니다. 수능시험에서 똑같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도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학생이 서울의 강남지역 학교를 다니며 좋은 사설학원 교육까지 받으며 같은 점수를 받은 학생보다는 더 나은 성취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죠.

 

둘째,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과거의 잘못을 보상해 줍니다. 보상논리는 흑인과 백인의 관계에서처럼 소수집단 학생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은 과거의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셋째,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다양성을 증가시킵니다.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인종, 민족, 출신지역들이 섞여 있으면 출신배경이 비슷한 학생들끼리만 있을 때보다 서로 더 많이 배울 수 있고, 결과적으로 학교나 지역사회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관점은 소득분배의 정의에 관한 롤스의 설명과 일맥상통합니다. 입학허가라거나 부의 획득 같은 것이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미덕에 주어지는 월계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이러한 주장들은 미국과 같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우쭐대며 자만하는 태도를 약화시킨다는 면에서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공을 능력과 미덕에 대한 보상이라고 외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불안하기도 하다고 저자는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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