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제4부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이론들을 토대로 세계 각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불평등한 상황이 전개되어 왔는지 설명(혹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가 가진 문화적 후진성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할 때 백인들의 간단한 대답은 원주민들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의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바로 유인원과 현생인류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믿기도 했죠. 오스트레일리아는 어째서 금속기, 문자, 정치적으로 복잡한 사회를 탄생시키지 못했을까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원주민들이 계속 수렵채집민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건조하고 척박하며 종잡을 수 없는 기후 때문에 수렵채집민의 인구는 수십만 명의 수준을 넘지 못했죠. 이는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잠재적 발명가의 수가 훨씬 적었다는 의미이고 새로운 발명품을 받아들여 실험하려는 사회의 수도 훨씬 적었다는 뜻이죠. 더구나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사회들이 서로 가깝게 상호작용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 극단적 예가 앞서 13장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태즈메이니아 섬이에요. 약 10,000년 전쯤 오스트레일리아와 이 섬 사이의 해협에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단절된 이 섬 사람들은 철저한 고립 속에서 생활했고 1642년 유럽인들이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섬 사람들은 세계의 모든 민족 중 가장 단순한 물질문화를 가지고 있는 상태였죠.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나, 특히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이처럼 유랑형 수렵채집민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그들이 유달리 완고했던 탓이 아니라 지리적 환경의 차이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중국은 적어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정치, 문화, 언어 등의 측면에서 획일적인 나라입니다. BC 221년에 이미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었고, 문자도 처음 생긴 이후 오직 하나의 문자체계 밖에 없었죠. 하지만 우리가 당연시하는 중국의 통일성은 실은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언어로 보자면 중국에는 여덟 가지 다수언어(그냥 통칭해서 “중국어”라고 부르는)뿐 아니라 130개 이상의 소수언어가 존재합니다. 언어지형을 잘 살펴보면 비교적 최근에 대규모의 언어교체 현상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북중국의 중국티베트어족 사용자들이 남중국으로 확산되었다는 것, 그리고 남중국에 거주하던 몇몇 고유의 어족들이 열대 동남아시아로 남하했다는 사실이죠. 그 과정에서 원래의 열대 동남아시아의 언어들은 심한 변화를 겪거나 사멸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왜 이런 변동이 생겼을까요? 저자는 일부 아시아인들이 다른 아시아인들보다 기술, 정치, 농업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중국은 식물의 작물화 및 동물의 가축화가 세계 최초로 시작된 지역 중 하나입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식량생산이 시작되자 11-14장에서 다루었던 문명의 여러 가지 특징들이 차례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에서 새롭게 발전된 문물의 주된 전파방향은 “북에서 남으로”였습니다. 특히 문자에서 이런 경향이 뚜렷했죠. 이 문자는 북중국에서 완성되어 남쪽으로 전파되어 갔고, 그보다는 영향력이 덜하지만 일본과 한국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일본과 한국에서는 중국 한자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10,0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동식물의 가축화, 작물화가 20세기에 남겨놓은 생생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장에서 언어학적 고찰을 통해 살펴본 바 중국본토에 거주하던 오스트로네시아 어족 사용자들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지역으로 이주해온 사건을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팽창”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지난 6,000년 동안 일어난 인구이동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라고 해요. (남중국 사람들과 인도네시아, 필리핀 지역 사람들은 외형적 특징과 언어학적 증거에서 서로 일치하는 같은 계열의 사람들이죠.) 문제는 어째서 중국본토에서 출발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여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교체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에요. 다시 말해서 왜 그 반대로 인도네시아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인들을 교체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지난 200년 사이에 유럽인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을 교체 또는 말살할 수 있었던 이유와 비슷합니다. 즉, 인구가 훨씬 조밀했고 도구와 무기가 더 우수했으며 더 발전된 배와 해상기술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렵채집민들이 저항력을 갖지 못한 유행병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지만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전역을 차지한 후 뉴기니 해안의 저지대까지만 차지했을 뿐 뉴기니 내륙의 고지대 사람들을 몰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또 왜일까요? (유전적 특성이나 언어학적 증거를 통해 볼 때 뉴기니 저지대 사람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고지대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죠.) 뉴기니 고지대 사람들은 근대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편에 속했고 이미 수천 년에 걸쳐 식량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오스트로네시아인이 뉴기니 고지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는 유리한 점이 별로 없었던 것이죠. 그 결과 원래 인도네시아에 살던 사람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팽창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지만 뉴기니 일대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이 경우에서도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예들과 마찬가지로 식량생산의 여러 가지 선행조건을 갖추고 다른 곳에서 기술이 확산되기 좋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그같은 이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교체한 것입니다.
어째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의 땅을 점령하지 못하고 그 반대가 되었을까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답 역시도 지금까지 많이 언급해왔듯이 식량생산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메리카와 유라시아의 식량생산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 종의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라시아는 13종이었는데 비해 남북 아메리카는 겨우 1종 밖에 없었죠. 이런 차이의 주된 원인은 남북 아메리카에 존재했던 대형 야생 포유류가 가축화되기 이전에 멸종되었기 때문이에요(제1장 참조).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들은 동물성 단백질이나 털과 가죽의 공급원이 되고, 주요 운송수단을 제공했으며, 전투에 필요한 탈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쟁기를 끌고 분뇨를 생산함으로써 농작물 생산량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늘날 흑인들이 살고 있는 많은 지역은 불과 몇천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요. 백인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아프리카에는 흑인뿐 아니라 전세계 인류를 여섯 가지로 구분할 때 다섯 인종이나 살고 있었습니다. 전세계 언어의 1/4이 아프리카에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특별하죠. 이같은 다양성은 다른 어느 대륙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이러한 특성은 지리적 환경이 다양하고 선사시대의 역사가 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섯 인종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 중에서도 왜 흑인들만 널리 퍼져나가고 나머지 네 인종은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AD 1,000년 경 아프리카에 살던 주요 다섯 인종은 우리가 흑인, 백인, 아프리카 피그미족, 코이산족, 그리고 아시아인종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인류를 구분하는 주요 인종 중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제외한 모든 인종을 포함하고 있죠. 그들 중에서 두 인종인 피그미족과 코이산족 중에는 농작물이나 가축을 갖지 못한 수렵채집민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인구 20만 명 정도의 피그미족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1∼2억 명의 흑인들 틈에 분산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이산족은 남아프리카의 좁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죠. 피그미족이나 코이산족은 예전에는 훨씬 널리 분포되어 지내다가 반투족이라고 불리우는 흑인 농경민들에 의해 쫓겨나거나 제거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추측이에요. 이 반투족의 조상들은 중앙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시작하여 점점 동남쪽으로 진출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코이산족은 반투족에 의해 대체되거나 농업에 부적합한 남아프리카의 적은 지역들에만 남아 생존하게 된 것이죠.
대륙 내의 사정뿐 아니라 다른 대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앞선 장들에서 제기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아프리카 대륙은 다른 대륙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고 기후와 생식지도 다양하며 인종도 다양하다는 이점을 지녔지만 아프리카가 유럽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 반대의 결과가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하는 질문 말이죠. 대답은 유라시아와 남북 아메리카와의 관계에서와 똑같은 이유, 즉 총기, 문자, 정치조직의 이점을 유럽이 갖고 있었고, 그 세 가지는 모두 식량생산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유라시아에 비해 식량생산이 늦어졌는데 그 이유는 가축화, 작물화할 동식물이 적었으며 남북축 때문에 식량생산과 발명품들의 전파가 늦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생물지리학적 우연(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동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얄리의 질문에 대해 저자는 본론의 내용을 통해 상세하고도 반복적으로 대답을 한 셈입니다. 즉, 각 대륙의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것은 그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째, 가축화와 작물화의 재료인 야생 동식물의 차이. 유라시아는 가축화, 작물화가 가능한 야생 동식물들을 가장 다양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기술과 문물과 제도에 있어서의 이동과 확산속도의 차이. 동서축으로 되어 있는 유라시아가 이 면에서 가장 유리했죠.
셋째, 대륙 내부에서의 확산속도뿐 아니라 각 대륙 사이의 확산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의 차이. 어떤 대륙은 상대적으로 더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습니다.
넷째, 각 대륙의 면적 및 전체 인구규모의 차이. 면적이 넓거나 인구가 많다는 것은 곧 잠재적인 발명가의 수가 많다는 것이고, 서로 경쟁하는 사회의 수나 도입할 수 있는 혁신의 수도 많다는 의미가 됩니다.
저자는 역사를 하나의 과학, 즉 체계적 학문으로 확대해 나가기 위해서 이 네 가지 요인들의 대륙간 차이를 더욱 상세히 수량화하고, 더욱 신빙성 있게 정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또 하나의 확대방법으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이 책에서 살펴본 것보다 더 작은 규모를 가지고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라시아 내에서도 왜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중국이 아니라 하필 유럽의 사회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식민지화하고 현대세계를 선도하게 되었을까 하는 식으로 말이죠.
두 번째 제안과 관련해서 저자가 피력하고 있는 나름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빠른 출발을 했고 중세까지도 세계기술을 선도했던 중국이 그 이후 뒤처지게 된 이유는 “만성적 통일” 상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될 경우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죠. 반면 유럽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만성적 분열”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경쟁과 기회의 분위기를 가져왔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저자는 연결성이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곳에서 기술은 가장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오늘날 중국이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전해줍니다. 상황은 바뀌는 것이며 과거의 우위가 미래의 우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식량생산을 시작한 두 중심지가 아직도 현대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도 여전히 사실입니다. 직계후손들의 국가(지금의 중국)를 통해서든, 두 중심지의 영향을 받던 이웃지역의 국가(유럽, 일본, 한국)를 통해서든, 아니면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를 통해서든 말이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아메리카 원주민 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는 면에서 BC 8,000년 당시의 역사가 지금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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